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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에세이 : 생각이 형태를 갖추고, 성찰이 글이 되는 공간

그것에 대한 무게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나는 유의해야 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12-28 13:14
조회
11485
그것에 대한 무게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나는 유의해야 했다

조금 전 택시에서 내려 목포항 대합실로 들어가 도초에 가는 배편에 대해 시간표와 경유지등을 곁눈질로 바라 볼 때 만 해도 그 섬에 들어 갈 생각은 없었다
주머니 속에는 이미 15시 45분 발 서울 행 비행기표가 있기도 했거니와 신정 연휴의 마지막 날 이었기 때문에 일을 저지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내심 비행기 표도 끊어 놓았고 여유라 봐야 고작 두 시간 정도 인데 설마 네가 일을 저지르랴 싶은 생각에 목포 시내에서 차나 한 잔 마시고 공항으로 가려던 것이 시나브로 목포항 까지 발길이 닿은 것은 배낭 깊숙한 곳에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미 개봉으로 들어있는 편지 한 통과 언젠가는 기어이 그 섬에 가고야 말거라는 내 자신에 대한 불신을 시험 하려는 무모한 시도가 포함돼 있었고 사실 목포를 향해 걸음을 내딛은 것부터가 그 섬에 가면 절대 안 된다 하는 전제가 깔려있었으니 절대 안 된다 는 기어이 그러고 말 것이다 라는 절망을 포함한 의미였다

되짚어 보면 연휴 첫날에 가까운 산을 다녀오겠노라며 짐을 꾸려 집을 나선 관악산 입구에서 혜미가 보고 싶다는 찰나의 시간 이후 몸은 어느새 목포에 와 있었고 어쨌거나 이틀은 잘 버티고 잘 지냈는데 ...

(아  사실은  연휴 한참 이전부터 도초로 날아갈 명분을  내가 나를 속일 명분을 아니 아  아니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우연을 이유로 내세우기에는 그 우연 이라는 명분이 이렇듯 볼품없으나 나는 이 정도의 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어야 한다.)

이제 공항에서 그 편지를 꺼내 쓰레기통에 넣으면 된다는 야릇한 안도감에 온몸이 시려오는 안타까움에 비행기 표 찔러 넣고 세상에 못 믿을 설마를 믿고 시간표를 그냥 한 번 보기나 하자는 것이 어느새 도초에서 나오는 배편과 서울 행 야간 열차에 시간을 맞추어가며 혼자 소리로 궁시랑 거리고 있었다
그 궁시랑 거리는 내 모습을 내가 보면서 나는 왜 이따위 행각을 벌여야 만 하는 걸까 하는 자학에 시달리는 바로 그때 대합실을 가르는 안내 방송이 시작 되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금일 홍도 흑산도 여객선은 먼 바다 풍랑으로 결항하오며 도초 비금 까지만 운항이 되겠습니다 이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몇 번이고 방송이 되풀이 되는 동안 도초 소리만 들으면 숨이 차오르면서 얼어붙는 증세를 일으켜 가까스로 몇 걸음을 옮겨 의자에 풀썩 주저앉고는 배낭을 내려놓고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연 이틀 동안을 목포외곽 해안선을 따라 도린곁으로만 걸은 탓도 있었지만 이틀 내내 편지 도초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그리움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지은 죄를 억 누르느라 숨쉬기조차 힘겨운 정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안내 방송이 멈추자 그제 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치듯 배낭을 짊어지려는데 출구 쪽 문이 열리면서 직원 한 명이 손에든 개표기를 출구 쇠 파이프에 대고 다다다 닥 닥 장단을 맞추어가며

자 십삼 시 이십 분 도초 비금 승선 하시지라 자식은 애비 보러 가구 뭍으로 도망간 삼식이 이제나 저제나 아니 올까 바닷가 노닐다가 어그메 과부 젖 빠지것네......,

술이 거하게 된 그 가락에 장단에 지붕을 뚫고 내려오던 한 줄기 빛이 흔들렸다 흔들림은 가락으로 가락은 장단으로 장단에 취기가 더해 약간의 요동으로 요동은 환희를 지나 적막으로 적막은 무의식으로 젖어들고 그러한 가 마비 상태에서 억압 되었던 등가물들은 육신을 뱃전에 올리고 뱃머리는 먼 바다를 향해 돌고 돌아가는 뱃머리를 따라 하늘이 돌고 도는 하늘에 기억의 모든 것들은 혼돈되고 혼돈에 의한 불균형은 의식을 바다에 빠뜨리고 분노한 바다는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모든 무게의 중심을 흩트리고 중심을 잃은 내장은 이 앙다물며 삼켜 두었던 모든 이물질들을 토해놓고 흥건한 토사물위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면 잠시 후 정전 나머지 호흡곤란......,

방향을 잡은 배는 이내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 절망을 어미로 한 시니컬한 웃음
그리고 다시 안내방송
안녕들 하시오 나가 선장 김 봉식이요 사실 말이요 이 배도 안 되는 거인디 아 나가 뉘기요 아 김 봉식이 아니요 날 믿고 존경하시는 우리 사장님이 출항 시켰응께 그리덜 알고나 계시시오 잉 아 사설은 이쯤 해 불고......, 우리 남해스타 쾌속선은......,
뻘 내음에 쇳소리 나는 안내방송이 끝날 즈음 선장은 자신을 만난 것이 천만 다행인줄 알라하며 마이크를 놓았다 선장이 말하던 천만다행이 내게는 불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섬에 있는 그나 나 모두에게......,

그녀가 도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여름, 휴가차 아내와 함께 설악산 P호텔에 묵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첫날 호텔 로비에서 기화란 녀석을 만난 때문 이었다
십년 만에 마주친 녀석은 이제 결혼 일주년 이라며 서로 부부간 인사를 치레로 했다. 바로 그날 저녁 녀석과 단 둘이 속초 시내 술집에 눌러앉아 맥주 서너 병 비우기까지는 그간의 생활과 서로의 일에 대해 맹물 같은 질문과 쌀뜨물 같은 대답으로 시공을 메워 나갔다 시간이 지나 기어이 꼬부라지고 자빠질 대 쯤 되서야 공간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기화란 놈과는 서산 궁리 앞 바다에서부터 K대 국문과 졸업 할 때 까지 줄곧 붙어 다녔던 사이였다 그러니까 십년 전 문제는 여자 여자의 이름은 양 혜미 기화란 놈과 나는 친구 혜미는 내 여자친구 기화는 언제나 늘 항상 모든 M 은 P 이다 그리고 모든 S 는 M 이다 따라서 모든 S 는 P 이다 라는 삼단 논법으로 혜미의 공유 권을 주장 하면서도 삼각관계 운운은 지독히 싫어했다 혜미는 같은 학교 도서관 학과 같은 학번 내가 혜미를 만나게 된 건 우연 이었고 혜미가 같은 서산 해미 출신 인 것을 알고 난 이후 필연을 다짐하며 늘 셋이 붙어 다녔다
그런 속 에서도 기화는 우리 둘의 한 걸음 뒤에서 혜미와 나와의 연인 사이에 단 한번도 트레바리를 놓는 일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누구도 우리 둘의 결혼을 염려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가난 했다 혜미 역시 넉넉지는 못했다 취직을 하고 조금만 돈을 모아서 결혼을 하자 약속도 했건만 졸업 이년이 지났을 때 교수님의 호출 가보니 장학금 후원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왈 휘규 이친구가 재능이 있으니 박사까지 밀어주시면 큰일을 할 놈 이라며 소개를 시켰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유학을 떠나게 되고 이후 일곱 살 연상,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야 마는 일이 있었다

서로의 잔을 바꾸어 채우고 그 잔을 들어 서로의 머리통에 부어가며 삐뚤어 질 것 다 삐뚤어지고 엎어질 것 다 엎어 졌을 때 결국은 그녀의 이름이 기화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너 이놈 그랬었지 그때 그 시절에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대 힛피아스 말이야 이 자식아
힛피아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딴건 그때일 우리가 청춘 일 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너 여기 있구 나 여기 있는데 그런데 혜미는 지금 어디 있냐 인마 어디 있느냐 이 말이야 인마 지금 바로 지금......,
혜미! 혜미라! ......,
이 자식 이거 더러워지기 까지 했네
무엇이 아름답던 간에 과거에 의해 현재를, 아니 미래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다 나는 됐다 꺾자 여기서 꺾어 뿔자
꺾어 뭘 꺾어 인마 너 사실은 혜미 소식이 궁금해서 이리로 온 거 다 알아 인마 이 비겁하구두 치사한 자식아
궁금해 뭐가 내가
다 알고 있다 이놈아 난데없이 휴가에 호텔까지 부장놈이 휴가나 다녀오라며 내 밀 때는 좀 뭔가 구리다 했는데 호텔 로비에서 널 딱 만나는 순간 난 소름이 좍 돋더라 이놈아 니 그 철저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 내가 또 니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그 막막함 니가 그걸 알기는 아니 그래 놀아 주마 놀아는 준다구 그러나 말이다 모든 것은 반전 된다 너 그걸 명심해라 그리그 고맙다 휴가에 호텔에 눈물난다 그래 쩐 넘쳐나니 좋기는 좋다마는 한 십년 지나니까 쩐 말구 정이 그리워 지드냐 이 개 만도 못한 놈아......,

그러고 나서 기화는 머리를 몇 번이고 쥐어뜯다가 도초 여관 운운하는 소리까지는 들은 기억이 있고 결국 우리 둘 다 호텔로 배달되어왔다
이튿날 우리 부부가 호텔을 떠날 때 녀석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시계를 거꾸로 돌릴 용기가 있을 때 열어 보라며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한마디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라고 했었다

배가 몹시 흔들렸다
앉아있는 몸이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내겐 배 이거나 몸 이거나 하는 것들이 흔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문제였다
아예 서있는 모든 것들을 자빠뜨릴 기세로 심하게 흔들렸다.
하나 이상의 이유를 가지고 이 배에 몸을 올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자세를 잡고 앉거나 눕거나 혹은 서 있거나에 관계없이 흔들렸다

나 역시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내겐 배 이거나 몸 이거나 하는 것들이 흔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문제랄 것도 없다 배가 섬에 닿는 대로 다시 표를 구해 아! 아니 내리지도 말고 이 배를 타고 다시 나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그만 이었다

아니 ! 아니 ! 아 아니 ! 사실 못나가게 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아니 안 나간다. 라고 말 하는 것 옳을 것이다 다만 내가 못나가게 되는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일단 그렇게 해야 만 우연 이라는 단어가 제 1선에 나설 수 있기 때문 이었다

곧바로 승무원을 찾아 나섰다 승무원을 만난지 채 오 분도 안돼 내 묘안은 깨졌다 아까 대합실에서의 높은 파도에 관한 안내방송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이었다 승무원은 일단 도초에 내려 하늘 님 처분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운이 좋으면 이 배가 다시 목포로 나갈 수도 있으나 아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라며 한 사나흘 뱃길이 닫힐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생각도 얹어 주었다

한참을 꾸물대던 배가 도초에 닿고 우르르 몰려 내리는 사람들 틈에 내 한 몸 휴지처럼 쓸려 내려야 했다 우선 눈길이 닿은 곳은 매표소 간절하지도 않은 희망과 아파 할 이유가 없는 절망, 희망이라 함은 다시 배를 타고 나갔으면 좋겠다. 하는 제 1의 외피적 요소와 이제 드디어 우연을 이유로 도초에 머물게 되었구나. 하는 제 1의 내피적 요소를 동시에 담고 있었으며 절망이라 함은 만약에 오늘 다시 나가게 되면 이제 정말 혜미를 단념하고 말 수도 있다. 라는 제 2의 외피적 요소와 십년 넘게 꾸며온 우연을 가장한 필연 앞에서 보고 싶다 까지만 설정을 했지 혜미를 만난 다음의 상황은 아직 설정이 돼있지 않음, 혹은 못함 내지는 할 수 없음, 그런 이유를 머리로 하여 사랑 하느냐 라는 직설에 부딪치면 오 ! 그 제 2의 내피적 절망

금일 결항 문의 사절
간단했다 매표소의 문구가 말이다
인간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니 문의 사절일 밖에, 이제는 내 웃음에서 개흙 냄새가 묻어 나왔다

보소 돈 떨어 전능교
말을 건네며 내 옆구리를 쿡 찔러주던 아낙네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쉬지도 않고 늘어놓았다 우선 우리 여관에서 짐 풀고 사나흘 걸릴 테니 송금 받아서 요금 내면 될 것을 왜 씰데 없이 비 맞은 개처럼 서 있느냐, 과부가 홀아비 마음 안다며 자기도 객지 출신 이라는 동질감을 유도하면서 지글지글 끓는 아랫목에다 얼른 몸을 뉘이라는 충고까지 올려놓았다

멀쩡해 보이는데 쪼매 미친놈 잉가베
아낙네가 중얼거리며 돌아서 간 것은 그의 알량한 배려에 난 그저 웃어 보였을 뿐인데 아마 그 웃음을 아낙네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 일 것이다

쪼매 미친놈 잉가베
그 말이 일단은 이 부둣가를 벗어나고 보자는 하나의 결정을 내려 주었다
택시에 올라 기사 아저씨에게 어디 조용한 곳으로 데려다 달라 부탁을 넣었다
시목리가 좋긴 좋은데 추응께 고란리로 가불제 하더니 교회 나가요 묻기에 그렇다 했더니 음마 나도 귀신 다 돼 부렀어 야 하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시시콜콜 숙소에서부터 민박에 이르기 까지 일러주고는 쪼매 있으면 예배 시간잉께 예배보고 여유 있으면 헌금 듬뿍허고 어두워지기 전에 전화 해 달라며 명함 하나 건네며 나가 교회 다닝께 이 짓거리 하믄 못쓰는데 며칠 팍 쉬어 뿌러야 항께 요것두 겸하믄 좋아 뿔제 하며 교회 마당에 나를 내려 놓았다 물론 교회의 목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도 잊지 않았다
되돌아 나가는 택시의 옆구리에 박혀있는 큼직한 고란교회의 글자들을 보며 나는 또 부둣가에서의 그 기묘한 웃음을 택시 기사의 뒷자락에다 흘렸다

야트막한 언덕 교회 주변은 참빗으로 빗어 넘긴 머릿결 같이 가지런한 곳곳에서 세심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휴식 공간, 배낭을 풀어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시며 물끄러미 배낭을 보다가 기어코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 봉투는 두툼했다 두개의 봉투 우선 잡히는 대로 편지를 꺼내 읽었다

친구 휘규
섣불리 이 봉투를 열지는 않았겠지만 네놈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의 대본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두개의 봉투 중 넌 지금의 이 편지를 먼저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가련한 놈 짐짓 놀란 척 이라도 해 주려마 아직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오년 전 동문들 끼리 도초를 향해 낚시를 떠날 때 까지만 해도 난 너의 대본에서 내가 영원히 삭제돼 있는 줄 알았었다 시목리라는 아름다운 해안에 그림 같은 집 그 펜션에 이틀을 머물도록 난 까맣게 몰랐었다 혜미가 그 집의 주인 인줄 말이다

하긴 그 집의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가 너를 참 많이 닮았음을 나중에서야 인정 할 밖에 없었지마는 그러기 이전에 얼핏 그 아이가 너를 연상하고도 남았을 때 제발이지 그런 상상은 하기도 싫었거니와 어떤 형태로든 너와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것에 대해 나는 필요 이상으로 못 견뎌 했었다 그 못 견뎌하는 내 자신 앞에서 나는 겹겹이 밀려오는 너에 대한 기피현상의 원인이 혜미 때문임을 네가 보기 싫은 것 아니 너를 생각하기도 싫은 것 그것 보다는 네 생각 뒤에는 필연적으로 혜미가 떠오르기 때문 이었다

나만의 사랑 내 방식대로의 사랑
나는 혜미가 보다 더 네놈과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늘 삼단 논법을 주장함에 있어서 네놈은 그 모든 속살을 다 알고도 그 모든 상황들을 잔인하리만큼 즐기고는 했었다

그래도 나는 네놈이 친구라서 좋았다 내 사랑하는 여자를 내 좋아하는 친구가 잘 어울림에 있어서 나는 자주감자 아린 가슴으로 그 시절을 보내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네놈이 그립다 이건 나의 아이러니이다
그러한 나의 아이러니를 면전에 내새워 그 집에서의 마지막 날 밤 한 잔 술을 사이에 두고 혜미와 마주 앉았으나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었다 혜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보다 더 혜미스러웠었다

잔인한 놈  혜미나 내가 그 하룻밤 내내 네놈이 이제 언제 쯤 우연 이라는 구름을 타고 나타날 것인가 하는 그러면 또 우리는 그 우연에 대해 모른 척 하며 네가 할당 해 놓은 내 역할에 충실하려 애써야 하는가 하는 나의 그 비애를 즐기는 더러운 놈

그러나 네놈의 대본에는 철저히 배제시킨 어느 한 부분이 있다는 걸 네가 저술한 思想과 倫理라는 그 책 속에서 알게 되었다

<주자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理의 성격에 관하여 보면, 理는 사물에 내재하여 動靜變合의 원리가 된다는 의미에서는 자연법칙이나, 理가 本然의 性,으로서 인간에 내재 할 때에는 인간행위의 지켜야 할 도덕규범이 된다. 즉 주자학의 理는 物理인 동시에 道理이며, 또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법칙과 도덕규범은 연속되어있다 이 경우에 이 연속은 양자의 대등적인 연속이 아니라 物理가 道理에 종속하는 종속적 연속이다 > 라고 註를 달아 놓은 그 허방다리를 조심해라 그러나 나는 끝내 네 친구 일 것이다

형제님 저도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
모란 향 머금은 목소리에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오 이런 언뜻 보아서는 혜미랑 착각 할 정도인 그녀의 선과 그녀가 입고 있는 혜미의 옷

아 예 좀 데워야 하는데......,
말을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그 찰나에 웃어 보이기까지의 냉정함과 눈앞의 그녀가 목사라는 것과 이전의 그것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도록 그녀는 말이 없었다

피마자를 짓이기는 듯한 틈새의 시간
전화 하셨어요. 친구 분 이요. 며칠 전에요
그녀는 시목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 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친구 분이 정확히 꿰차고 있으시더군요. 아마 늦어도 오늘은 섬에 들릴 것이라 말 하더군요. 전에 낚시 오셨을 때 혜미씨가 인사 시켜주셨지요. 형제님 사진은 혜미씨가 보여주었었고 그 아니라도 알겠네요. 한 눈에......,
그녀는 단문의 말들을 듬성듬성 하늘에 뿌렸다

커피 따듯하네요. 말씀하시던데요. 친구 분께서. 형제님은 가로세로의 합이 같은 마방진 게임을 즐기신다고......,
교회 안에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이 섬에 오게 된 이유를 묻더니 혹시 제가 형제님의 그 마방진 숫자 안에 포함돼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시던데요.
이제는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찬송가 소리까지 흘러나온다.
나는 기억의 더듬이를 저 멀리 십 년 전까지 밀어 올린다.
내 결혼식에 온 기화가 말했다.
혜미가 네 아이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돌봐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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