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수 이야기
글: 앙코르 라이프 객원기자 이진화(수필가)
매서운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저녁, ‘박목수 찻상전’이라는 현수막을 따라 들어간 인사동의 갤러리 M에는 한 사람의 손길에 의해 거듭난 나무들의 수런거림으로 훈기가 가득했다. 여러 빛깔의 찻상들은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와 같이 주변에서 흔히 보던 나무 외에도 스무나무, 가래나무, 가죽나무라는 낯선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느슨하게 뜬 실모자에 터키석 빛깔의 셔츠와 동색 계열의 수직 스카프를 두르고 작은 안경을 쓴 박목수의 웃음도 나무결과 닮아 보였다. 작업을 통해 다져진 근육과 마디 굵은 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자세로 작업을 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박인규(52세), 이미 인사동 갤러리와 미술계에서는 본명보다‘박목수’가 더 친근한 이름이 되었다. 2007년 12월, 우리 나이로 쉰 살에 인사아트센터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고 불과 삼 년 만에 열 번의 개인전을 열며 세상을 술렁이게 한 장본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퇴직을 하는 나이에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나타나 목수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것도 광속도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시간의 축적을 믿으며 일일이 손으로 하는 작업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고집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충청도 땅의 바다가 먼 고장에서 자랐다. 그래서 늘 낯선 섬과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찻상들이 물고기 모양을 닮아 불현듯 바다로 떼를 지어 헤엄쳐 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나, 고인돌과 자궁의 이미지를 숨겨놓고 아득한 기억으로 감싸 안는 것도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 때문일 것이다. 모태신앙인이 갖는 영적 갈망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항거는 오랫동안 그의 내면에서 갈등 구조를 이루었다.
소년은 삼남 이녀 중 둘째로 말이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고학을 하며 기술을 배웠다. 전공자가 아닌 만큼 더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와 인정을 받았다. 특수 기계 설계를 하던 엔지니어가 문학에 대한 꿈을 가지고 돌연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공사현장에서 척추가 주저앉는 부상으로 죽음의 길목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이 캄캄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하반신 마비가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끈질기게 걷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재활치료가 아닌 부랑인 시설 꽃동네의 자원봉사를 택했다. 맨손으로 옴이 오른 환자들의 상처를 씻어주고 대소변을 주무르다 피부에 옴과 독이 번졌다. 그러나 재활에 대한 의지와 가족을 위한 묵언의 기도는 삶이 휘청거릴 때마다 반복되었다.
자영업도 해보고 인테리어 사무실도 차렸으나 번번이 접어야 했고 과도한 노동과 허리의 통증 때문에 절절 매는 날이 많았다. 극도의 우울감과 외로움 속에 삶을 포기할까 하는 유혹을 종종 받았지만 막노동과 대리운전까지 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잊지 않으려고 종종 금이 간 척추 사진 필름을 꺼내보았다. 그럴 때마다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건축 현장에서 일을 계속하기는 힘들었다. 문우의 출판기념회 선물로 만든 작은 서안(책상)이 만들고 난 후 짬이 날 때마다 나무로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고 그의 작업을 본 친구는 인테리어나 목공일보다 창작을 해보라는 권유를 했다. 그의 손은 독특한 작품들을 하나씩 내놓기 시작했다. 손에 마음이 있다고 믿는 그는 손을 아끼지 않았다. 틈틈이 시와 소설을 쓰고 노동을 하면서 책을 읽는 가운데 머릿속에 자신만의 그림을 하나씩 그려나갔다.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사진 분야의 독학을 하는 동안 영감이 샘솟듯 터져 나왔다. 어떻게 매일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고뇌 속에서도 오직 나무 작업에 매달렸다. 고통스럽지만 기쁨이 있는 창작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일상의 가지치기와 극한을 넘어서는 작업이 이어졌고 어언 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박목수’가 되었다.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 속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초록 물고기/무성의한 밤나무 찻상/일엽이촉 느티나무 찻상/알 수 없는 기억/나는 세상을 몰라요/마주 앉아본 기억이 너무 멀어/섬, 이전에 별이었던/그를 위한 기다림/비상(飛床)... 작품의 제목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는 우리 땅에서 나는 나무만 가지고 작업을 하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한다. 나무의 속살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서야 작업을 시작하는데 때로는 땔감으로 버려진 나무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하기도 한다. 내년에는 나무와 찻상, 삶과 죽음, 사랑과 구원에 대한 ‘박목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새로 태어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룬 그의 작품 목록에 언제부턴가 나무가 아닌 광물성 재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의료용 기계의 모터를 만들고, 오디오 시스템을 디자인하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는 또 다른 발명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과학과 예술의 조우가 있다. 세상과의 소통을 그리며 만든 ‘초록 물고기’에 황동과 청동판으로 옷을 입히고 수천 개의 못으로 비늘을 박았다. 대여섯 번의 부식을 하여 신비한 빛깔을 낸 물버림 찻상 ‘초록물고기’의 몸에는 거스름 가시가 없이 매끈하다. 얼마나 갈고 닦았길래 못 머리가 그렇게 둥글게 마모되었을까. 마치 구도자의 침묵 기도나 오체투지와 같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땀과 눈물로 퍼포먼스를 하는 사내를 상상해보라. 척추부상자가 수십 킬로그램에서 백 킬로그램이 넘는 나무들을 혼자 이리 저리 끌어안고 옮기며 작업을 하는 괴력은 나무와의 교감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박목수의 작품을 소장하고 애용하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 사용하는 사람의 체격 조건에 맞는 주문형 앉은뱅이 책상과 찻상, 그밖에도 여러 개의 박목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소설가 이외수 씨는 말한다. ‘박 목수의 작품들은 우아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부로 발산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에 놓이더라도 조화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그윽한 멋스러움을 함유하고 있다. 화려한 장식과 기술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가구점 제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그는 목수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겨 ‘박목수’라는 이름과 낙관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달빛 아래 목련처럼 저절로 빛이 난다.’고 하는 방송인 전유성 씨는, ‘맞다, 박 목수가 나무를 알아보는 게 아니라 나무가 박 목수의 예사롭지 않은 손길은 느끼면서 알아서 빛이 나는 것일지도 몰라!’라고 개그맨다운 평을 한다. 그 역시 박목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지지자 중의 하나다.
그의 작업 철학은 무형태, 불균형, 부조화이다. 무엇을 자꾸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형태를 살리고 숨은 그림을 찾아주는 것이다. 한 번 더 손을 대는 것보다 마음을 내려놓고 거두는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그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 아닌 타인들에게 아름다움 혹은 그들의 잠재된 욕구에 불을 질러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꾸고 사실 또는 진실을 말하고 싶다면 먼저 왜곡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아름다운 왜곡은 예술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1무 2불의 철학 속에 나오는 역설적인 조화로움은 둥근 자연 속에서 결코 직선이나 수직을 만날 수없는 지구인의 한계와 완성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박목수는 충청북도 제천의 한 폐교에서 살며 홀로 작업을 한다. 작업장 주변에는 삭기를 기다리는 나무판들이 서있거나 누워있다. 비, 햇볕, 눈바람 속에서 젖었다 마르고, 얼었다 녹으며 선택될 날 만을 기다린다. 더러는 흙 속에 파묻히기도 하고 불에 그슬리기도 한다. 그러다 선택이 되어 박목수의 손을 거쳐 찻상이 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폐교의 빈 교실에는 아이들 대신 어린 찻상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한다. 나무의 자식들이 이룬 숲에서‘박목수 이야기’는 그렇게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다. 벌레와 세균을 쫓으려고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처럼 세상에 대해 낯을 가리던 박인규란 나무인간은‘박목수’라는 아티스트의 손을 잡고 나날이 변화되어간다. ‘오랜 시간과 기다림 속에서 뽕잎이 비단이 되듯이...’